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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 지로(SUGAWARA Jiro) · 가미야 아츠시로(KAMIYA Mutsuyo) · 이나바 모리
혼다 마사오리 (HONDA Masanao) · 미라시 쇼타로 (MISAKI Shotaro)
하야시 사와코(HAYASHI Sawako) · 모리토 시게토미(MORITO Shigeomi) · 다나카 시게루(TANAKA Shigeru)
德田哲哉(TOKUDA Tetsuya) · 와타나베 노부(WATANABE Shinobu)
나는 공감한다, 고로 존재한다. Empathiam sentio, ergo sum ● Ⅰ. 20세기는 전쟁과 혁명, 그리고 질병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인플루엔자는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에 이어 엄청난 인구감소를 가져올 만큼 혹독한 질병이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었으나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에서 1억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캔자스 헤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에서 발생한 독감에 감염된 젊은이들이 전쟁에 징집돼 유럽의 전선으로 흩어지면서 ‘질병의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군인의 대량 이동, 낙후한 위생, 의료의 부족 등이 독감의 확산을 부추겼다. 결국 이 질병이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해는 심각했다. 그리고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격전의 현장이었던 태평양전쟁은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종결되었다. 냉전 구도 속에서 베트남과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 68혁명으로 대표되는 60년대 변혁운동을 거치며 20세기는 1990년대 초 동구권의 개방과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함께 저물었다. ● 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테러가 일상을 바꿔놓았다. 9·11 이후 테러가 일상화되면서 특히 서구에서는 주요 보안시설은 물론 미술관과 같은 문화시설에서조차 엑스선 검색 장비를 통과하고도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후에야 입장할 수 있는 ‘이상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 사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폭탄을 잔뜩 실은 차량이 민간인이 밀집한 시장과 같은 시설로 돌진하거나 폭탄 조끼를 입은 테러리스트가 도시 한 가운데서 자폭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불어 여러 나라에서 연쇄적으로 혁명과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스(SARS-CoV), 신종플루(H1N1), 메르스(MERS) 등 바이러스 질환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나 세계를 일시에 멈추게 만들지는 않았다.
Ⅱ. 마침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창궐했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 선언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거나 경험하지 못한 낯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진원지로 지목된 우한(武漢)이 순식간에 멈춰버린 초현실적 장면을 목격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 세계가 멈출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한으로부터 속출한 희생자는 중국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희생자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장의 시설이 포화상태가 되고 매장할 묘지가 부족해 시신을 냉동 트럭에 보관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2021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182만 8천 명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넘긴 1월 26일, 전 세계 확진자의 누계가 1억 명을 돌파하였으며, 사망자는 2백 2십 4만 6천 명을 상회했다. 이 수치는 빅데이터가 각 나라의 공식발표를 집계하여 발표한 것으로서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사회적 거리두기’, 그것도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마스크 착용의 의무화는 물론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조차 금지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금지’에 의해 우리는 거의 감금되다시피 했으며, 학교에서는 비대면 수업이, 직장에서는 재택근무가 이루어졌다. 당연히 종교 활동조차 제한받았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 비난과 지탄은 물론 처벌까지 감수해야 했다. 백신을 보급할 때까지 대부분 나라가 국경을 걸어 잠그는 ‘자발적 유폐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팬데믹의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진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박수와 감사를 보냈다. 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도록 꽁꽁 동여맨 보호 장구를 푼 간호사의 땀으로 부풀어 오른 얼굴과 손을 보며 우리가 보여준 것이 그들의 희생에 대한 공감과 지지였다. 영업시간과 출입 인원의 제한으로 파산지경에 놓인 소상공인이 버틸 수 있도록 정부가 공적 자금의 투입을 결정할 때 동의한 것도 그들의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의 공포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연대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새로운 온라인공동체의 형성이다. 온라인공동체는 고립된 우리가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지하고 결속하며 우정을 나누는 ‘공감의 공간’이었다. ● 그러나 디지털미디어에 기반한 온라인공동체가 ‘새로운 일상(new normal)’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만나서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교류, 공유하는 것을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현실은 잘 보여주었다. 한 예로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각자의 좁은 집에서 어쩔 수 없이 격리 생활을 하던 주민들이 베란다에 나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것을 기억한다. 악기가 없으면 냄비뚜껑과도 같은 가재도구를 들고 나와 두드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런 일은 물론 SNS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서적 교류와 유대는 직접 만나 교감할 때 상승한다는 것을 앞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Ⅲ. 다른 사람의 감정, 경험 또는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려는 능력이나 과정을 공감이라고 한다. 공감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능력을 일컫는다. 공감에 의해 감정적으로 연결되고 이러한 긍정적 상호연결이 신뢰와 지지, 결속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다. 이는 소통의 개선과 갈등과 문제 해결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 공감(empathy)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려는 노력이나 능력이라고 할 때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거나 느끼지 않더라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공감은 깊은 윤리적 기반을 지닌 인지적, 감정적 반응으로 이타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를 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감하거나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쾌감을 느끼는 것을 감정이입(sympathy)이라고 한다. 공감이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위로와 연민 등의 감정적 반응을 나타낸다, 그래서 공감이 객관적이고 이해 중심적이라면 감정이입은 주관적이고 감정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관점에서 감정이입 또는 연민의 감정도 공감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비롯하여 불평등과 빈곤, 환경파괴 등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욕망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많다. 더 많은 물질적 소유와 독점은 인간세계를 위험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진화를 거치면서 연대와 공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그것이 공감과 연민의 뿌리였는지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인간들은 이 질병이 자연을 학대, 착취해온 인간에게 가이아가 내린 징벌이 아닐까 반성했다. 마침 ‘인류세(Anthropocene)’ 논의가 확산하면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인간/비인간, 즉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생명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움직임이 지질학, 인류학, 자연생태학은 물론 예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예술창작에서도 공감은 중요한 개념이다. 미국 낭만주의 시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공감과 창의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라고 말로 은유한 바 있다. ●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감성적 이해를 더 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아픔을 깊이 인지하고 배려하는 노력이나 능력은 사회적 관계에 개선은 물론 자기치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때로는 프랑스 현대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가 제안한 ‘불화’처럼 적극적인 공감을 위해 짐짓 불화의 방법을 포섭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공감을 철학적 담론으로까지 끌어올릴 지력이 없으므로 이 전시에서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따라서 상식에 입각하여 ‘공감’을 말하고 싶다. 예술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보편직인 믿음은,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예술을 지탱하는 힘이자 이유일 것이다. ● 마치 우리가 언제 팬데믹을 겪었나 의아해할 정도로 빨리 질병의 고통을 추억처럼 여기는 기이한 현상처럼 빨리 잊어버리기에 현실은 냉정하고 복잡하다.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랑시에르처럼 불화하기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여전히 공감의 나눔과 교류가 작동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4년은 한국과 일본 조각가들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결속과 연대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이 전시를 통해 공감에 바탕을 둔 연대와 결속이 굳건하게 다져지기를 바란다.
최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