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Exhibition

11월의 전시 3인전

청담동에 위치한 CAAG 갤러리는 2023년 10월 28일부터 11월 17일까지 안종대, 김정연, 안종배 작가의 단체전 < 3인전> 을 개최한다.

● 안종대의 Le temps (실상)

 

 

안종대 작가는 “실상”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은 시간이나 마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는데, 정작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작가의 90년대 초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실상'(實相) 작업은 자연을 바탕 삼아, 시간을 그 위에 담아내고 있다.

오늘 우리는 그가 보냈던 시간을, 또한 우리가 무심코 보낸 시간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김정연의 부드러운 집

 

내 작품과 삶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부드러운 집 부조 작업들은 하루, 하루의 나의 삶이자 일기이다.

<부드러운 집>은 일상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자전적인 서사의 내용으로 표출된다.

작은 패널 표면에 부조화되거나 그려진 도상들은 하나하나가 집이며, 방이며 나의 몸이 된다.

집의 형태에서 출발해 그 안에 서식하거나 기생, 분열, 증식을 거듭하는 반복적이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다른 생의 습관을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 일상에 대한 풍경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보여준다.

라텍스의 피부나 금속판, 사포를 변형, 가공해서 만든 사람의 형상들…….

강가에서 우울한 날, 햇빛이 화사해 행복한 날, 여러 날에 걸쳐 주은 돌멩이들……

매일의 집의 형상을 암시하는 다양한 변형의 부드러운 육면체 구조들……

일기를 쓰듯 매일 매일 하루, 그 시간만의 나만의 집과 나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그 개별성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는,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 사는 모습과 집, 인간 그 속에 쌓여가는 시간들을 희망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집’ 형태는 나의 작품과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작품 안에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평온한 이미지를 구축하려 한다.

나의 작품은 하루, 하루의 풍경이다……. 마음의 기록이다…

● 안종배의 두상

 

나이가 들어가니 허공을 읽고 허망한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눈을 감고 입을 닫아야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그 고스트 들의 얼굴을 가지려고. 수만번의 정질로 캐내는 일을 하고 있다.

내일도 눈을 감고 귀를 막아 그 얼굴들을 골라내러 갈 것이다.

“Le temps: 실상”

안종대는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수년에 걸쳐 자연스러운 풍화와 산화과정에 노출시키며 그 변화의 흔적과 시간을 작업으로 엮었다. 본 전시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진 <실상(Le temps, 實相)> 연작의 현상(現狀)을 되짚고, 작가가 추구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표가 될 것이다. 지난한 기다림과 존재론적 물음 끝에 한층 원숙해진 안종대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본 전시는 현재, 미래의 경계를 초월하여 실존하는 작가의 ‘실상’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1981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올라 회화를 전공한 안종대는 1988년 파리 유진 에메페르 갤러리(Usine Ephemere)에서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갖게 되었다. 이전까지 전통적인 평면회화 위주로 작업하던 안종대는 이를 계기로 붓을 내려놓고 홀로 묵상하는 시간을 보냈으며, 우연히 캔버스에 물을 뿌리다가 천에 스며든 물 자국과 얼룩에서 영감을 얻어 다양한 설치작업을 발표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가의 <실상> 연작이야말로 자연의 흔적과 시간의 형상화 등을 통해 그 스스로 예술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계기였다. 그의 작품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오랜 질문의 결과로 작가가 우리 가까이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시화하고자 한 산물이다. 안종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환경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는 드러남과 숨김,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모든 존재요소에서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 주체자인 작가의 의도에서 결과물이 벗어나지 않도록 관찰하면서 오브제를 재배치하는 인위적인 행위와 자연의 풍화에 작업을 내맡기는 시간이 공존하는 안종대의 독특한 작업과정은 이러한 예술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넓은 자연을 배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생성, 변화, 소멸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안종대의 작업은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 등에서 널리 퍼지며 자연적인 힘과 그로 인한 변화를 기록한 대지미술과도 궤를 같이 한다. 안종대의 작업들은 대부분 야외에서 이뤄지며, 이에 작품의 주 재료를 묻는 질문에도 작가는 일관적으로 “빛, 물, 바람, 기다림의 시간”이라 답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모두 <Le Temps>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안종대의 기다림의 미학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안종대는 만물이 시간의 흐름 안에서 고정불변할 수 없으며,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진 시간의 축적물을 어느 한 순간의 상(像)으로서 목격하는 것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그의 실상 연작은 소멸과 변화의 결과물이자, 어느 곳에도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일면을 보여준다. 2019년 개인전을 통해 선보였던 한지를 붙인 작업 또한 시간의 다층성을 자연스럽게 암시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종이가 배열된 화면은 모두 작가가 직접 염색하고, 말리고, 쌓는 수공예적 과정을 통해 독특한 흔적을 남겼다. 차곡차곡 쌓인 색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위에 놓인 종이부터 색이 바래고, 이를 들추어 보면 본래의 화사한 색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결국 안종대의 색지 작업은 자연의 빛과 시간을 색(色)으로 채집하는 과정이며, 작품에 시간이 쌓이듯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도 연륜이 생기고 색이 깊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종대는 작품을 시작한 년도는 기록해도 ‘완성한 년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가의 삶의 방향을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단어인 ‘실상’은 모든 사물이 단순히 모두 옛것이 되고 없어진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만물이 조화와 순환을 거듭하며 나아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안종대의 작품이 ‘영원한’ 가치에 집착하는 현대를 살아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바란다.
< 부드러운 방-시간⋅거울⋅심담(深談) >

 

김예경, 홍익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정연 작업의 근간은 ‘시간’이다. 작가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자전적 성향이 강한 작가의 작업에서 시간은 먼저, 거울에 비유된다. 즉, 자기를 비추는 ‘거울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연에게 시간은 삶을 직면하고, 자신을 포착하고, 미지의 가능성이 늘 그리운, 삶의 현장이다. 작가의 작업을 만나기 위해선, 그 어떤 외부적 시선을 거두고, 단순해져야만 하겠다. 피투(被投)적 존재로서 김정연의 시간이 불안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의미에서의 작업의 원동력이다. 작업은 불안과 자유롭고 적정한 ‘나’ 경계에서 이뤄지며, 매 순간의 고군분투를 담는다. 그래서 심담(深談)이다. 나의 오랜, 두터운, 나만의 이야기란 뜻이다.
첫 딸아이를 낳고 매달렸던 초기의 ‘돌 작업’(여성의 육체성이 두드러진 이 작업에선, 큰 규모의 단단한 돌을 파고 들어가 얻어낸 유연한 곡선이, 저항하는 매체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섬묘纖妙의 힘이 느껴진다), 그것을 잇는 ‘부드러운 집’(천을 이어 만든 입체작업이다. 결혼에서 시작된 삶의 동요, 어려움, 비-언어적인 고통의 시간을 버텨내고자 시작한 작업이며, ‘나’에 대한 질문이 강하다). 이후 나타난 파란 청동 조각의 ‘어린 왕자’ 시리즈(질풍노도기의 사춘기 아들을 키우면서 시작한 작업이며, 무심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상은 성(姓)이 불분명하고, 기묘한 느낌이다). 앞의 폭풍과 같은 청년기를 지나, 엄연한 삶의 중반기에 들어선 김정연의 이번 작업은 폭풍의 시간대를 벗어나, 안전과 감내한 자만이 아는, ‘자기만의 시간대’에 앉아 있게 된 느낌이다. 자연으로 치면 순풍의 시간이다. 작업은 추상과 구상이 무심히 공존하고, 인물이 줄고, 더 직관적이고, 더 덜어내고, 더 느긋하다.
스스로도 강조해왔듯이, <부드러운 집>은 김정연의 나름 초기작이자 토대적인 작업이다. 조각난 천에 담긴 토르소(자화상)를 바느질로 이어 정방형의 방을 만든 설치 작업인데, 그 안에 배려, 수용, 소통에 대한 기원을 담는다. 이 <집> 이후의 평면작업에 도입된 조각보 화면들은 <부드러운 집>이 그 기반임을 알려준다. 이번 작업 또한 <집> 작업의 일환이다. 작업은 <부드러운 방>에 이어지지만, 천의 토르소(torso) ‘구멍’이 암시하듯이, 원형(原形)의 방에는 변화와 확장이 일어난다. < 시간⋅거울⋅심담 >에 나타난 변화는, 평면이 메인으로 자리잡고(나름 돌출된 평면은 입체를 다뤄온 작가의 흔적이다), 작은 조각보 형식이 경계 없이 이어지고, 색채가 부상한다는 것이다. 추(상)구상의 모티브들은 작가가 알고 모르는 심상을 담는다.
김정연의 작업 방식을 ‘요행’(徼幸, 뜻하지 않게 얻어진 행운)이라 칭해보자. 사실, 작가들에 있어서 작업의 많은 요소는 운 좋게 얻어진 것들이다. 이는 오늘날 모든 작가가 일인 기획자이고 현대미술에서 개념적 설계가 중요한 시대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현대미술이 우연의 개념에 몰두했던 것을 기억하자. 무의식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삶의 주위를 부유하다 ‘때’가 되면 반짝이며 표면 부상하는 심상들, 형태들, 물질들. 그리고 모진 ‘사냥’과 포획의 시간, 진땀 나는 작가의 추격전. 장흥에 위치한 가나 작업실은 바닥에 널브러진 오브제가 가득하고, 공간은 마치도 익숙하고도 먼 형상을 낚기 위한 넓은 무의식의 사냥터 내지는 낚시꾼의 그물과도 같다. 그 안에서 이미지, 형태, 매체는 오랜 것과 지금 또는 내일의 것이 자유로이 엮이고, 위계 없이 은밀히 조우한다. 지금의 요행은 어디로 작가를 안내할는지. 김정연의 ‘되기’(devenir)가 궁금해진다.